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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구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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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정구는 1927년 좌옹 윤치호의 손자로 태어나, 1957년 대한민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선장으로 인도양 참치 조업에 성공하여 한국 원양어업 개척에 기여했다. 그는 이후 제동산업, 동화, 고려원양 등에서 원양어업 및 기업 경영 활동을 했으며, 1995년 오양수산 사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1991년 월해수산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7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부터 원양어업 발전 공로 감사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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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구 (192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윤정구
한자 표기尹鼎求
출생일1927년 4월 7일
사망일2018년 11월 18일
국적일본 제국 → 대한민국
직업어부, 기업인, 어업인
배우자박혜준
자녀윤도영, 윤건영, 윤혜영
부모윤광선 (아버지), 남궁자경 (어머니)
친척윤치호(할아버지), 윤용구 (형), 윤명구 (동생)
학력부산수산대 졸업

2. 생애

윤치호의 손자이자 윤광선과 그의 부인 남궁자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사회사업가, 계몽운동가이자 작가인 한서 남궁억이다. 농림장관을 지낸 오당 윤영선은 그의 큰아버지였고, 윤일선, 윤보선은 7촌 아저씨이며, 윤치영은 재종조부가 된다.

1948년 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배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선박의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심상준의 제동원양회사에 입사, 지남호의 선장이 되었다.

1957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지남호를 몰고 인도양으로 갔다. 농림부 수산어로과장 남상규, 어업지도관 이제호 외에 수산진흥원 직원들이 동승했고, 미국에서 특별히 초빙해온 참치잡이 경력자인 모르간 등이 동승하였다.

1957년 6월 26일 지남호를 타고 인도양 원양 조업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배를 몰고 가 나라의 살 길을 찾아라'는 뜻으로 배 이름을 지남호로 지었다.[2]

1957년 8월, 지남호를 이끌고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하였다.[1] 16명의 선원들은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물고기(새치) 한 마리를 잡았다.[1] 지남호는 하루 0.5ton~1ton씩 모두 10ton 가량의 어획고를 올리고 108일 만인 10월 4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1]

1958년 1월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첫 상업 조업에 나섰다.[2] 1년 3개월간 조업해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00ton 가량의 어획고를 올렸다.[1]

尹丁求|윤정구중국어는 제동산업, 동화, 고려원양 등에서 원양어업 개척 및 경영 활동을 했다.[1] 오양수산 사장으로 재직하며 맛살, 오징어 튀김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 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5]

1995년까지 현장에서 일하다 오양수산 사장을 끝으로 은퇴했다.[1] 주식회사 동화의 상무, 고려원양 상무, 1976년 고려원양어업 전무이사, 1979년 고려원양어업 부사장을 역임했다.[1] 1969년 7월 5일 동영화학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4] 1980년 9월 오양수산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1985년 9월 26일 맛살, 젖갈류 외에 오징어 튀김구이인 오양진미시리즈를 개발하였다.[5] 1990년 5월까지 오양수산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5]

2. 1. 초기 활동

윤치호의 손자이자 윤광선과 그의 부인 남궁자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사회사업가, 계몽운동가이자 작가인 한서 남궁억이다. 농림장관을 지낸 오당 윤영선은 그의 큰아버지였고, 서울대학교 부총장과 총장을 지낸 윤일선, 상공장관, 서울시장,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7촌 아저씨이며, 서울시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은 재종조부가 된다.

1948년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을 졸업하고 배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후 여러 선박의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심상준의 제동원양회사에 입사, 지남호의 선장이 되었다.

1957년 6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지남호를 몰고 인도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농림부 수산어로과장 남상규, 어업지도관 이제호 외에 수산진흥원 직원들이 동승했고, 미국에서 특별히 초빙해온 참치잡이 경력자인 모르간 등이 동승하였다.

2. 2. 현대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

1957년 6월 26일, 윤정구지남호를 타고 인도양 원양 조업에 나섰다. 부산항 1부두 해양경비대 강당에서 정부 관계자와 수산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1]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배를 몰고 가 나라의 살 길을 찾아라'는 뜻으로 배 이름을 지남호로 지었다.[2] 지남호는 인도양 시험 조업이 임무였으나, 참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윤정구와 선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326000USD를 들여 1949년에 도입한 배였지만, 연근해 시험 조업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6월 29일, 지남호는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대만 근처에서 지남호에 동승했던 미국인 어업 지도관이 허리를 다쳐 배에서 내리면서 어려움에 부딪혔다.[2] 윤정구는 선원들을 독려하며 "전쟁의 참화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조국을 생각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험 조업을 성공시키자"라고 말했다. 다행히 대만에서 참치연승어선에 잠깐 탔던 경험이 있는 선원이 한 명 있었다.[2]

물을 아끼기 위해 세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출항 한 달 보름이 지난 광복절에 처음으로 참치를 잡았다. 사람 키만 한 황다랑어가 물 밑을 휘젓는 모습에 윤정구와 선원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2] 첫 참치 조업에 성공하고 보름 뒤에는 10ton의 참치를 잡았다.[2]

2. 3. 인도양 참치 조획 성공

1957년 8월, 윤정구는 지남호를 이끌고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하였다.[1] 그의 지시에 따라 낚시를 던진 16명의 선원들은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물고기(새치) 한 마리를 잡고 함성을 질렀다.[1] 그는 "당시 어획량이 0.5ton 정도에 불과했지만 순수 우리 기술과 우리 선원들의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라는 데 감격스러웠다"라고 회고했다. 지남호는 하루 0.5ton~1ton씩 모두 10ton 가량의 어획고를 올리고 108일 만인 10월 4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1]

지남호의 인도양 조업 소식은 당시 싱가포르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에 보도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알게 되었고, 지남호가 잡은 새치는 부산에서 비행기로 경무대로 공수되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쳐졌다.[1]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새치를 참치로 알고 기념 촬영까지 했다.[1]

윤정구는 시험 조업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1958년 1월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첫 상업 조업에 나섰다.[2]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1년 3개월간 조업해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00ton 가량의 어획고를 올렸다.[1]

2. 4. 어업, 기업 활동

尹丁求|윤정구중국어는 제동산업, 동화, 고려원양 등에서 원양어업 개척 및 경영 활동을 했다.[1]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기지(사모아)에 주재원을 파견하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오양수산 사장으로 재직하며 맛살, 오징어 튀김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 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5]

1995년까지 현장에서 일하다 오양수산 사장을 끝으로 은퇴했다.[1] 이후 주식회사 동화의 상무를 거쳐 고려원양 상무, 1976년 고려원양어업 전무이사, 1979년 고려원양어업 부사장을 역임했다.[1] 1969년 7월 5일 동영화학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4] 1980년 9월 오양수산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1985년 9월 26일 맛살, 젖갈류 외에 오징어 튀김구이인 오양진미시리즈를 개발하였다.[5] 1990년 5월까지 오양수산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5]

3. 상훈

4. 가계

관계이름출생일사망일비고
할아버지윤치호
아버지윤광선1898년1950년
어머니남궁자경다른 이름은 남궁삼인
윤용구(尹龍求)1918년 2월 16일?
형수한원희(韓元姬)1920년 6월 23일?
누나윤자희(尹慈姬)1920년 3월 1일?
매부김명호(金明浩)청풍 김씨, 김진억(金鎭億)의 아들
누나윤정희(尹貞嬉)1924년 5월 5일2010년 9월 26일
매부채동규1918년 1월 5일2003년 12월 18일
여동생윤성희(尹成姬)1929년 5월 7일2016년
매제원석연 (화가)1922년2003년 11월 5일
동생윤명구(尹明求)1931년 11월 29일?
동생윤경구(尹慶求)1945년 5월 17일
제수박추지(朴秋枝)1947년 9월 9일
부인박혜준1926년 1월 18일2008년
아들윤도영1954년 9월 29일
며느리김혜경1954년 9월 4일
손자윤원섭(尹元燮)
아들윤건영1961년 11월 29일
윤혜영(尹惠榮)1957년 3월 19일


4. 1. 직계

좌옹 윤치호의 손자이자 윤광선과 그의 부인 남궁자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사회사업가, 계몽운동가이자 작가인 한서 남궁억이다.[1]

4. 2. 친인척

큰아버지 윤영선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7촌 아저씨로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윤일선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이 있다. 재종조부는 서울특별시장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윤치영이다.

참조

[1] 뉴스 원양어선 1호 지남호 선장 윤정구씨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7-06-27
[2] 뉴스 먼 남쪽 바다서 나라 살길 찾았다 http://www.busanilbo[...] 부산일보 2007-06-27
[3] 뉴스 매일경제 1973-08-16
[4] 뉴스 매일경제 1969-07-05
[5] 뉴스 매일경제 1985-09-26
[6] 뉴스 한국 원양어업 50주년 국제심포지엄 개최 http://www.newswire.[...] 뉴스와이어
[7] 뉴스 “망망대해서 참치 처음 낚던 감격 아직도 생생”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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